오늘 내가 이악물고 이끌고 오던 것들이 나 없는 새에 정리가 되었다.
내가 있었던 것 같은 자리에 나는 사라지고 내 주변 모든 사람들은 그대로 남았다. 철저하게 배제당한 기분.
그냥 무언가 처참했다. 왜 처참한지는 몰랐다.
나는 옛날에 몸과 정신을 망쳐가며 사랑하던 일이 있었다. 그 일을 하며 수많은 사랑하는 동료들의 퇴사를 지켜봐야했고, 교통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어깨수술을 하고, 정말정말 나의 신념에서 하면 안되는 일들을 수없이 했다.
하기 싫어도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나만이 할수 있고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어찌나 오만한지.
지금 생각해보니 과거의 내가 했던 일중 안타까운 일들이 많이 있다.
그때 교통사고를 당하고 나서 다시 회사에 와서 일하지 말걸,
그때 나의 아가가 죽고나서 아무렇지 않은척 회사에 와서 일하지 말걸,
그때 이건 아닌것 같다고 하지말자고 할걸,
과거의 나는 “괜찮지않아요” 라는 말을 못하는 사람이라서 “괜찮아요!”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었다. 방법을 찾는건 쉽고, 힘든건 내 마음뿐이니까 내 마음쯤은 충분히 이겨낼 수 잇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음이 다치는건 일을 못하는 것 보다 훨씬 더 인생에서 여파가 컸다. 일을 못하는 건 성과가 안나오는 거고 회사가 돈을 못버는 거지만, 내 마음이 다치는건 어떻게해도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가 없었다. 이것도 마음이 다치는 경험을 해보니 알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지금도 그사람이 “정말 이렇게 만들어서 미안하다. 다른 방안을 알아보고 처리해주겠다”라고 말하며 한번이라도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줬다면,
어제의 대화한 그분이 “고생많으셨어요, 방법을 한번 찾아볼게요”라고 만 말해줬어도 이렇게 까지 힘들지 않았을 텐데.
과거의 나는 항상 “괜찮아요”라는 말로 포장해서 무언가를 했던 것 같은데 이 얼마나 일방적인가를 깨닫고 난 뒤의 공허함은 무섭다. 사람을 다시 사랑하지 않게 되는 일. 다시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지는 감정.
나의 왼쪽 팔에는 “if i didn’t have blank, ”라는 타투가 새겨져있다. 2019년에 새긴 말이다. 과거에 무언가를 하지않았다는 걸로 후회하지말자 라는 뜻으로 새겼던 것 같은데 불과 몇년후의 나는 “하지말걸”이라는 고민을 하고있다.
아름다운 이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아름다움”을 위해 내가 지금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하고 있는지, 상대방이 알고있을까? 그리고 상대방은 “아름다운 이별”을 준비하고 있지 않은데 나 혼자 노력한다고 되는건가? 라는 고민이 싹트기 시작한다. 증오의 감정이 싹튼다.
증오는 아주 무섭다. 나에게 욕을 하게 만들고, 나에게 화를 내게 만들고, 내가 구석에 찌그러져서 울게 만든다. 나는 증오로 인해 탄생한 내 자신이 좋지 않다. 그 이유는 나의 증오가 어디로든지 전파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증오로 물든 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을 꺼려하는 버릇이 생겨버렸다. 이제는 솔직까지 더해져서 “나 지금은 대화하면 안될것 같아”라는 말을 할수도 있게 되었다.
그런데 아직도 증오로 가득찬 나는 아름다운 이별을 하고 싶다. 그것만이 내가 바라는 것이었는데, 상대방은 아름다운 이별따위를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다.
너무 지겹다. 언제까지 이렇게 일방적으로 노력해야하는걸까?
나의 일방적인 아름다운 이별을 위한 노력이 하루빨리 끝났으면 좋겠는데, 나는 노력하지 않는 법을 배운적이 없어서 아직 알 수 없다.
오늘 밤도 하루 빨리 이 이별을 끝낼수 있기를 바래본다.
몇천번을 반복하며 상상해온 아름다운 이별, 지겨운 이별, 저는 지금 정말로 괜찮지 않다. 노력이 배신하는 순간만큼은 절대 마주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노력이 배신하는 순간이 오고있다. 나는 받아들여야한다. 슬프지만 아름답지 않은 이별을 하게 될 것이고, 상상만으로도 너무 지겹고 불행하지만
적어도 아름답지 않은 이별을 또다시 경험하게 되는 나의 지겨움이 부디 어서 지나가길 바란다.